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    春雨
/허난설헌

  春雨暗西池
보슬보슬 봄비는 못에 내리고
  輕寒襲羅幕  찬바람이 장막 속 스며들 제
  愁倚小屛風 뜬시름 못내 이겨 병풍 기대니
  墻頭杏花落 송이송이 살구꽃 담 위에 지네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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찰박찰박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. 늦잠이었다. 토요일인지 일요일인지 긴가민가하다. 며칠이 지난것도 아닌데 벌써 기억에서 사라져버렸다. 단지 봄비가 내리는 소리와 회색빛깔의 공기만을 기억하고 있을뿐이다. 아, 베란다의 창을 열고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에 찬 흙내음을 맡은 것도 기억이 난다. 비를 보고 이런 포근함을 느낀게 언제쯤이더라...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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여우 이야기 - 권혁웅  (1) 2006.03.25
Posted by 라스핀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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여우 이야기
권혁웅

골목길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여우가 그녀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를 처음 알아본 것은 그녀가 아니라 여우였다 긴치마에 가방을 모아 쥔 손이 가지런했다 흰 발목과 꼬리가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다가가자 여우의 눈빛이 반짝, 빛났다 여우가 나를 알아보았을 때 겨우 열다섯이었으므로 나는 그녀의 곁을 지나쳐 갔다 목덜미가 간지러웠다

삼 년 후에 다시 여우를 만났다 한성여자고등학교 하교길, 여우는 고갯마루에 앉아 있다가, 깔깔거리며 지나가는 학생들 틈에 끼어들었다 나는 몰래 여우를 따라갔다 골목을 돌아 한 대문 앞에서 꼬리를 놓쳤다 집에는 병든 노모와 아이들이 보채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겨우 열여덟이었으므로, 닫힌 문 앞에서 발길을 돌렸다

대학 때에 그녀를 만났다 그때 겨우 스물둘이었으므로 나는 그녀와 백년해로할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그녀에 대해 안 건 아홉에 하나였다 왜 열이 아니냐고 물어볼 사람은 없겠지 그녀와의 보금자리는 늘 풍찬노숙이었다 천 일을 하루 앞둔 어느 날 결국 그녀는 나를 버렸다

그 후로도 자주 여우가 출몰했다 어떤 여우는 몇 년 동안 내 그림자를 밟다가 사라지기도 했고 어떤 여우는 내가 맛이 없다고도 했다 여우인 줄 알고 버렸던 그녀가 몇 년 후에 여봐란 듯이 아이를 낳기도 했다 그때마다 간이 아팠으나 며칠 후면 새살이 돋곤 했다

나는 아직도 겨우일 뿐이다 당신과 마찬가지로 나도 다음이 궁금하지만 미안하게도 내게는 뒷 이야기를 기록할 여백이 없다 여우는 겨우 말하면, 달아난다 당신도 알다시피 여우 이야기는 늘 미완이다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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라스핀 曰.  그렇다. 늘 미완이다. 게다가 肝도 무척이나 괴롭도록 아프다. 새살이 돋아나긴하지만 scar는 나도 모르는 깊숙한 곳에 남아있다. 뭐.. 그렇다고 울거나 청승떨지는 않는다. 그러기에는 나이가 너무 들어버렸다. 여우를 찾는 일 말고도 할 일(?)이 엄청나다는 선생님(?)의 말씀에 침잠할뿐.
Posted by 라스핀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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